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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적 성경신학 아버지와 아들에 관하여 리뷰

by The Hidden One 2025. 10. 27.

조직적 성경신학 1 - 아버지와 아들 신학 책 리뷰

『조직적 성경 신학 1. 아버지와 아들 신학』은 해롤드 애벌리 박사님이 히브리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관계적 존재’로 조명한 책이다. 전통적인 무시간적·무감정적 하나님 개념을 넘어, 시간 안에 개입하시고 감정으로 반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신학적으로 제시한다. 지금, 한국 교회와 신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다.

하나님은 무감정하고 멀리 계신 존재인가?

전통적인 서구 조직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출발했다. 그 철학은 변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 즉 ‘완전함’이란 어떤 변화도 경험하지 않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시간과 감정,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무시간적이며 무감정한 존재’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사유는 헬라 철학의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 개념으로 대표되며, 하나님을 모든 것의 원인이지만 자신은 어떤 외적 사건에도 반응하지 않는 절대자로 그려낸다. 이런 철학적 틀은 이후 초대 교부들의 신학과 중세 스콜라주의에 흡수되면서, 신학적 권위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완전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감정과 변화를 인간적인 한계로 간주하고 배제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감정이 없는 완전한 존재(impassibilitas Dei)’로 설명했으며, 이것이 이후 서구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개신교 정통주의 역시 이 틀을 그대로 계승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불변하며, 시간과 사건의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와 감정의 현장에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영원한 계획’을 세워놓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예정된 대로 흘러가게 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해롤드 애벌리 박사님 바로 이 지점에서 신학의 근본을 뒤흔드는 질문을 던진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조직적 성경 신학 1. 아버지와 아들 신학』에서 서구 신학이 헬라 철학의 언어로 하나님을 해석한 결과, 성경의 하나님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한다. 성경 속 하나님은 결코 감정 없는 절대자가 아니다. 아브라함을 향해 기뻐하셨고,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슬퍼하셨으며, 니느웨의 회개 앞에서 마음을 돌이키셨다. 모세의 중보에 반응하셨고, 다윗의 눈물을 들으셨으며,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는 진노와 사랑이 동시에 드러났다.

애벌리는 “이러한 하나님이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시며, 감정과 관계를 가지신다. 그분은 시간 밖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분이 아니라,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울고, 웃고, 반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애벌리는 이를 ‘시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Time-bound God)’이라 부르며, 이것이야말로 성경 전체의 일관된 증언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지 않으시며, 인간의 기도와 반응에 실제로 움직이신다. 그분은 기계적인 우주의 조정자가 아니라, 인격적 교제 속에서 사랑을 표현하시는 관계의 하나님이시다.

이 신학적 관점은 단지 교리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다. 만약 하나님이 감정 없는 존재라면, 인간의 기도와 눈물, 회개와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감정과 반응을 가지신 분이라면, 우리의 삶은 그분의 마음에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애벌리가 강조하는 성경적 신학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을 철학의 대상으로 이해하지 않고, ‘관계의 중심’에서 다시 바라본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느끼고, 반응하시며, 사랑으로 움직이시는 분이다.

결국 『조직적 성경 신학 1』은 “무감정적 하나님”이라는 서구 신학의 가정을 해체하고, 하나님을 다시 ‘살아 계신 아버지’로 회복시키는 작업이다. 그분은 단순히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사랑이시다. 신학이 철학의 틀을 벗어나 관계의 자리로 돌아올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또한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회복될 수 있다.

신학이 놓친 ‘아버지 하나님’

『조직적 성경 신학 1』에서 해롤드 애벌리 박사님이 강조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회복하는 일이다. 이는 단순한 감성적 표현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본질이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아버지이셨으며, 그 본성과 성품은 관계, 사랑, 감정, 그리고 인격적 교제를 기반으로 드러나셨다. 그러나 서구 조직신학은 오랫동안 이 성경적 계시를 철학적 개념에 종속시켰고,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본질적인 진리를 조직신학의 중심에서 밀어냈다.

서구 신학은 고대 헬라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을 ‘완전한 존재’로 정의했다. 이 완전성은 변화하지 않음, 감정 없음, 시간 초월, 자족성 등으로 설명되었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인간과의 상호작용이나 감정적 반응을 할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을 인격적 아버지로 보기보다는, ‘존재론적 최고봉’ 혹은 ‘우주의 원리’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아는 신앙은 곧 ‘올바른 교리 체계’ 혹은 ‘논리적 개념의 숙지’로 축소되었고, 하나님과 실제적인 친밀함과 관계를 맺는 일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애벌리는 이 철학 중심의 신학 흐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어낼 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무감정적이거나 관념적인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모세와 친구처럼 대화하며, 다윗의 찬양에 감동하고, 선지자들의 외침에 분노하신 하나님은, 철학자들의 절대자 개념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하신 계시는,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아버지됨’에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애벌리가 서구 신학의 핵심 용어 중 하나인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한다는 점이다. 전통 신학은 성경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감정, 움직임, 대화 등을 모두 인간적 언어의 한계 때문이라고 말하며, 이를 ‘비유’ 혹은 ‘상징’으로 축소해왔다. 그러나 애벌리는 이러한 시도가 결국 하나님을 실제 존재가 아닌, 추상적 철학 개념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에, 우리의 감정성과 관계성은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 관점은 신학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경험하고,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 삶에 감정적으로 개입하신다고 믿는다면, 신앙은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체계가 아니라, 마음으로 교제하는 삶이 된다. 예배는 정보를 수집하는 시간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순간이 된다. 기도는 계획된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실제로 대화를 나누는 관계적 행위가 된다.

결국, 애벌리는 하나님을 다시 ‘아버지’로 회복하지 않는 한, 기독교 신학은 생명을 잃고 추상만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나님은 무감정하고 무시간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자녀들과의 관계 안에서 웃고, 울고, 반응하시는 살아 계신 아버지이시다. 이 책은 신학이 다시 철학이 아닌 성경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며, 그 중심에는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는 본질적인 회복의 메시지를 던진다.

지금, 왜 이 책이 필요한가

『조직적 성경 신학 1』에서 해롤드 애벌리는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회복하는 것이 신학과 신앙 모두에 있어 필수적인 전환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단지 존재론적으로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감정과 의지, 반응과 교제를 가지신 인격적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서구 신학은 하나님을 점차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로 축소해 왔으며, 이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할 대상’은 남겨두었지만, ‘사랑할 아버지’로 느끼는 감각은 희미하게 만들었다.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하면, 교리와 신앙의 모든 영역이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기도는 왜 효과적인가? 우리가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이 실제로 듣고 응답하신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감정과 반응, 의지가 있으신 분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시간 밖에 계시며,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만을 실행하시는 존재라면, 기도는 단지 나의 신앙 고백일 뿐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의식이 되고 만다.

애벌리는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존재라는 사실이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하시고, 인간의 결정에 반응하시며, 때로는 인간의 기도와 중보를 통해 판단을 유보하거나 방향을 바꾸신다. 이런 하나님은 단순히 우주를 설계하고 지켜보는 시계공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기뻐하고 슬퍼하며 함께 걸어가시는 ‘아버지’이시다. 이 인격성은 단지 성경의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실체이다.

또한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회복은 신앙인의 정체성과 신앙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하나님이 감정을 가지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라면, 신자는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그분의 자녀로서 사랑을 받고, 사랑을 돌려드리는 관계 속 존재가 된다. 이 관계성 안에서 순종은 의무가 아닌 기쁨이 되며, 사역은 부담이 아닌 특권이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종교적 수행이 아니라, 실제 인격적 만남과 삶의 나눔이 된다.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하는 전통적 신학의 논리 중 하나는, 감정과 변화가 하나님을 ‘불완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이다. 그러나 애벌리는 이런 철학적 불안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감정이 있는 하나님이 오히려 더 위대하시다.” 감정은 불완전함의 표시가 아니라, 관계적 충만함의 증거이며, 성경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감정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표현하신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눈물을 흘리셨고, 분노하셨으며, 제자들을 향해 따뜻한 감정적 표현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는 곧, 하나님의 본질에도 감정이 있으며, 인격적 교제가 본래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책은 인격적 하나님을 회복하는 것이 단지 한 가지 신학 이론의 선택지가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 전체를 재정립하는 핵심 열쇠임을 선언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존재하시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반응하시며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신학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회복은, 신학적 개혁이자 신앙적 회복이며, 무엇보다 오늘날 하나님과 단절된 듯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을 다시 열어주는 은혜의 메시지다.

 

『조직적 성경 신학 1』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관념적 해석을 넘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이고 감정적인 관계를 복원하자는 거대한 신학적 요청이다. 해롤드 애벌리 박사님은 전통적인 서구 조직신학이 간과해온 성경의 본래 언어와 정서,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대한 실제적 관점을 선명하게 회복한다.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느끼고, 신앙을 ‘정보’로만 이해하는 시대 속에서, 이 책은 하나님이 단지 거룩한 이상체나 철학적 절대자가 아닌, 오늘 이 시간에도 감정적으로 반응하시고, 자녀들과 교제하시며,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인격적 아버지이심을 강하게 외친다. 이 회복이 없다면 교회는 점점 더 메마른 신학 속에서 기능만을 수행하는 종교 구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해롤드 애벌리는 철학이 신학의 기초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철학이 아닌,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살아 있는 인격이다.

『조직적 성경 신학 1』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기초를 다시 ‘아버지와 자녀’라는 관계 위에 올려놓으며,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질을 제시한다. 특히 목회자, 신학생, 사역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이 책을 통해 왜곡된 하나님상을 벗고, 회복된 아버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분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분과의 사랑의 교제 안에서 자라고 누릴 때, 진짜 신학은 시작된다. 『조직적 성경 신학 1』은 바로 그 길로 이끄는 탁월한 안내서다.